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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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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날짜 20-03-11 18:37 조회1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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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명 뮤지컬 연기학원 원장 연기선생님 한창완 입니다. 

만약 이 칼럼을 읽고 있다면

배우가 되고 싶거나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고민하는 입시생이겠죠? 

연기선생으로서 여러분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 위해

연기를 하게되면 지겹도록 듣게될 작가 안똔 체홉에 대해 알려주려 합니다.

 

1편 체홉의 생애 / 체홉의 사상 및 의도

2편 체홉의 사실주의 / 체홉의 분위기

 

 

총 2편으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안톤체홉은 “연극의 교과서”라고 흔히들 말하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학생분들이 꼭 알아야 할 희곡 작가입니다.

더 자세히 배우고 싶다면 지금 바로 연락하세요!!!

 

- 안똔 파블로비치 체홉 (Anton Chekhov, 1860 – 1904)-

 

체홉의 생애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860년 1월 17일 (일설에는 16일), 남 러시아의 아조프 해에 임한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태어났다. 체호프는 선천적으로 성격이 밝은 소년이었다. 그는 떠들거나 사람을 놀리거나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줄곧 사람을 관찰하고는 우직한 교회의 머슴, 춤추는 연극 배우, 치과 의사, 경찰서장 등의 흉내를 우스꽝스럽게 잘 내서 주의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뒤에 그가 4백여 편에 가까운 유머 단편을 쓰는 데 있어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쌓아 올리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 두 가지 재난을 경험하게 된다. 그 한 가지는, 체호프 아버지의 전제주의였다. 체호프의 아버지 파벨은, 어느 날 팔려고 갖다 놓은 올리브유통 속에 쥐가 빠져 죽은 것을 보고, 일부러 사제를 불러 기도를 올린 다음에야 손님에게 팔았을 만큼 고지식한 장사꾼이었다. 아울러 교양이 부족한 지방 도시의 상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군으로, 집안을 매로써 다스렸고, 어린 자식들에게 가게 일을 맡겼다. 게다가 자식들을 자기의 즐거움인 교회의 성가대에 앉혀 강제로 성가를 부르게도 했다. 전기 작가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체호프가 초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맨 처음 한 질문은 “집에 가면 매 안 맞니?” 하는 한마디였고, 만약 “맞지 않아.” 하는 대답을 들으면 깜짝 놀라면서 믿지 않았다고 한다. 체호프 자신도 훗날 “나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두 번째 재난은 그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파산하자 모스크바로 야반 도주해서 집안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졌던 일이다. 아버지의 파산 전, 체호프의 두 형들은 모스크바에 나가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전제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술과 환락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파산 이후 집안의 책임은 자연히 셋째 아들인 체호프가 떠안게 되어 그는 오랫동안 가족들을 보살펴야 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체호프가 따뜻한 마음과 성실함,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몰락한 집안의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인품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고학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은 체호프는, 3년 동안 늘 걱정하며 지내던 모스크바의 가족에게 돌아가 그곳에서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일설에는 소년 시절에 병을 앓아, 그때부터 의사를 동경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가 왜 의학부를 태했는지 그 동기를 정확하게 전하는 기록은 없다. 의학부에 입학한 체호프는 공부하는 틈틈이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짧은 유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때마침 러시아 사회는 지식인들에 의한 여러 차례의 브나로드 운동이, 당국의 탄압과 농민들의 보수성 때문에 실패한 뒤라 시민들은 좌절감과 위축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저속한 유머 주간지나 유머 신문들이 유행했다. 젊은 체호프는 그러한 주간지나 유머 신문의 투고란에 착안했다. 이것이 그의 25년에 걸친 문필 활동의 시작이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단편을 쓰는 동안 체호프의 작가로서의 이름은 점차 높아갔다. 의학부를 졸업한 다음 해인 스물다섯 살이 되던 연말에, 체호프는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보수 성향의 신문 <신시대>의 사장에게 융숭한 대우를 받는다. 또한 다음해 3월에는 당시 문단의 선배인 그리고로비치로부터 격려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체호프가 그때까지 써 온 주간지나 오락 신문은 시시한 문인이나 탐방기자의 무대였으므로 그는 비로소 러시아 작가로서의 면허증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체호프에게는 어떤 주의나 주장, 사상이 있었을까? 초기 단편이 그랬듯이 체호프의 수법은 정경 묘사와 기지를 골자로 삼고 있을 뿐, 사회 비판이나 사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극히 현실적인 문제로서,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편을 썼던 그로서는 작품 속에 어떠한 사상을 투영시킬 겨를이 없었다. 초기 단편 중에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 있더라고 그것은 허를 증오하는 성실하고 인간적인 그의 인품에서 우러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신성한 것은 인간의 육체, 건강, 지혜, 재능, 영감, 사랑, 절대적인 자유, 어떠한 형태로도 나타나든 모든 폭력과 거짓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이 내가 대 예술가라면 지키고 싶은 강령입니다” 이렇게 그는 편지 속에 쓰고 있다. 그 무렵 체호프는 자신의 창작 태도를 “예술적 문학이란,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그림으로써 예술적이라 이름 붙인다”고 정당하시켰다. 그가 사상이 있는 장편 소설을 쓰려고 지망했을 때, 그는 자기에게 아무런 사상도, 주의, 주장도 없었음을 깨닫는다. 뿐만 아니라 온갖 세상일을 겪은 자신의 사회 지식이, 독선적인 사상이나 주의에 반발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1888년 1월 체호프는 <광야의 왕 고골리>에 도전할 생각으로 그의 작품으로서는 꽤 긴 중편 소설 <광야>를 집필한 뒤, 3월에 역시 중편소설 <등불>을 썼다. 1890년 서른 살을 맞게 된 해의 봄, 체호프는 단신으로 마차를 몰아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서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은, 그 무렵 죄수 섬이라 일컫던 사할린 섬의 수형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가 병든 몸으로 이런 힘겨운 여행을 하려 했는지 그 동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우울과 초조감에 빠져있던 그는 이 여행에서 그 어떤 전기를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로서의 영광을 누린 체호프는, 흔히 영광 뒤에 따르기 마련인 압박과 초조 때문에 자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사할린 섬 여행을 그의 전환기로 본다면, 그것은 체호프에게 있어서 자기 회복이며, 자기 확립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에서 그는 상당량의 조사 기록인 <사할린 섬>을 썼는데, 이 조사 기록에 대해 그는 “의학에서의 의무를 완수했다”고 썼다. 그가 사할린 섬 여행에서 얻은 첫 번째 확신은 사실의 중요성을 재인식 했다는 점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진실은 무척 빈약한 반면 소문만 무성하다.” 라고 그는 어느 편지에 쓴 적이 있다. 죄수 섬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루어지는 논쟁과 실제 눈으로 직접 본 사실과의 차이, 그것을 알았을 때 체호프는 주의, 주장이나 사상이 아무런 사실을 바탕으로 두지 않고도 무책임하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할린 섬 여행에서 얻은 두 번째 확신은 톨스토이 철학으로부터의 탈각이었다. 작가로서의 체호프는 기성 작가로부터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악에 대한 무저항의 철학이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또 간음의 비난과 같은 톨스토이의 도덕에 상당히 기울어진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죄수들이 저항하지 않고 매를 맞으며, 빈곤과 음탕과 병이 음산하게 소용돌이치는 사할린 섬을 다녀온 뒤로는, 그러한 톨스토이적인 사상이 결국은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무시한 헛된 공론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체호프의 희곡은 흔히 분위기의 극, 혹은 정극이라고 한다. 이렇다 할 뚜렷한 줄거리나 사건도 없이 작중 인물의 일상생활과 대화, 인간이 가진 서로 다른 개성들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어려 관계들이, 한편의 인생의 시를 보는 듯 무대의 분위기를 차차 고조시킨다. 그러한 요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대사 사이의 무언, 효과 음악의 활용, 서정적이고 간결한 대사, 연구되고 계산된 대화의 묘, 나아가 다면적인 무대의 사용 등 온갖 극작상의 기교가 구사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체호프의 잔잔하고 암울한 희곡이 갖는 이상한 박력, 긴박감일 것이다.

 

 

- 안똔 파블로비치 체홉 (Anton Chekhov, 1860 – 1904)-

 

사상 및 의도

 

체홉은 모스크바 예술극장 (1889- 1904)과 교류하는 동안에 무대 사실주의의 정의를 다시 규정하였다. 체홉 작품의 의미는 직접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극의 행동에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의미는 체홉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지방 러시아의 삶에 대한 진실한 재현에 담겨있다. 그리고 체홉 작품의 등장인물과 분위기의 내적 진실을 해석하려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방식은 연극사상 가장 위대한 협업의 결과를 낳았다. 체홉은 자신의 희곡에서 세기의 전환기에 러시아 지방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조용한 절망’에 대한 삶을 그렸다. 체홉의 등장인물들인 지방 귀족, 작가, 교수, 의사, 농부, 하인, 교사, 공무원, 주둔군 등은 먹고 마시고,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을 그만 두고, 카드나 당구를 하면서 일상 생활을 보낸다. 체홉은 19세기 무렵의 관객들이 으레 기대하는, 그리고 잘 짜여진 희곡에서 장려되는 ‘비중 있는’ 순간을 피했다. 만일 살인이나 자살이 있다면 그것은 무대 밖에서 벌어졌다. 체홉 희곡의 구조는 스펙터클하지 않는 삶의 일상적인 단조로움이며, 그 극적 행동은 비논리적인 행위 안에 담겨 있다. 체홉의 희극은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남기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체홉의 ‘발견’ 장면은 오델로의 발견, 즉 자신이 이아고의 허수아비였고 죄 없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발견과 다르다. 그 대신 그의 등장인물들은 삶이 자신들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세월이 전부 어디로 가버렸지?” 라는 것이 바로 비탄에 찬 그들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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